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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음악(Recorded Music)...

올디 2010. 11. 2. 17:29

녹음된 음악 : Recorded Music

최초의기록보다는 좀더 들어가보는 의미에서 레코드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서술합니다.
음악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향수자가 작품을 직접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특수성이 있으며 시간과 장소의 제약 때문에 청중 또한 극히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흐가 오르간을, 베토벤이 피아노를,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아무리 훌륭하게 연주했다 해도 우리는 그들의연주실력을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소리의 기록'이라는 뜻의 레코드가 발명됨으로써 일회성이라는 연주의 숙명에도 변화가 생겨 언제 어디서나 다시 듣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기록하는 장치들을 고안했으나 그 공은 T. 에디슨에게 돌아갔습니다. 에디슨은 원통형으로 된 소리의 기록장치를 발명하여 포노그라프(phonograph)라 이름짓고 소리를 재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최초로 녹음한 소리는 "메리에게는 작은 양이 있었다. < Mary Had A Little Lamb>"라는 동요의 한 구절이었고(1877), 그 후 주로 짤막한 연설문 따위를 녹음했었습니다. 에디슨이 발명한 포노그라프의 소리재생기능을 보완하여 1887년 에밀 벌리너가 아연판으로 된 원반 레코드를 제작하여 그라모폰(gramophone)이라 명명하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1888년 12세인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이 최초로 음악을 녹음했는데, 그후 그는 거장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1902년은 음악의 녹음사상 기억될만한 해입니다. 최후의 카스트라토[去勢歌手]인 알렉산드로 모레스키가 죽기 몇 해 전에 그의 노래를 음반으로 남긴 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던 카스트라토의 노래를 녹음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레코드가 지닌 기록성으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도 레코드의 음질이 좋지 못해서 이름난 연주가는 아무도 녹음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레스키를 녹음했던 유능한 레코드 제작자 프레드 가이스버그는 바로 그해(1902) 엔리코 카루소와 엘마 칼베를 나팔관(마이크) 앞에 세워 녹음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서 샬리아핀의 녹음에 착수하여 귀중한 음반을 남겨놓았습니다. 이어서 아들렌 파티, 릴리 레먼 등 역사상 중요한 성악가들의 노래가 음반으로 나왔고, 레코드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면 영영 그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수많은 귀중한 성악가(넬리 멜바, 루이자 테트라치니, 제랄딘 타라, 갈리 쿠르치 등) 들의 노래가 후세에 남게 되었습니다.

1903년 브람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아힘이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 바흐의 소나타 1번 중 전주곡 등을 녹음했고, 페르 귄트의 작곡가 그리그와 추억의 작곡가 드르들라 등도 소품을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파가니니 못지 않게 명성을 떨쳤던 바이올리니스트 P. 사라사테가 〈치고이네르바이젠〉을 포함한 자작곡 4곡을 녹음한 것이 진귀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레코드 발매는 성황을 이루어 미국의 빅터 레코드는 1902년 100만불의 순이익을 올렸고 런던의 그라모폰은 타이프라이터의 생산을 중단하고 레코드 생산에만 전념하게 되었으며, 1904년 독일의 그라모폰 하노버 공장은 하루에 2만 5천장의 레코드 제작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1908년 독일의 그라모폰은 나팔관 없는 축음기를 발매했고 620만장의 생산을 기록했습니다. 1910년부터 관현악만의 레코드를 처음 발매하기 시작하여 보급되었으나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은 한때 레코드 산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생산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레코드 산업이 활발했고 1915년에 OK레코드가, 1919년에 RCA(Radio Corperation of America)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24년 전화회사에 의해 전기 녹음이 발명되고 빅터 레코드가 최초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된 바흐의 〈코랄 프렐류드 D단조〉를 제작하기 까지는 녹음된 음반의 질이 여전히 좋지 않았으며 잡음투성이여서 '귀중한 기록적 가치'가 있을 뿐 감상하기에는 알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비약적으로 레코드 산업이 발전했으나 1929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다른 모든 산업과 마찬가지로 레코드 산업도 큰 타격을 입었으나 1930년대의 레코드 음질은 놀랍도록 좋아졌습니다.이무렵부터 바흐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녹음되기 시작했으며, 1934, 35년 18세의 메뉴인에 의해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이 녹음되었습니다.비슷한 시기에 60세인 카잘스의 연주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전곡 녹음되었고 바흐의 〈평균율〉이 녹음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이 1930년대의 레코드는 회전수가 1분에 78회전과 80회전인 SP레코드였지만, 레코드 규격이 정형화되었으므로 비로소 레코드가 음악감상에 중요한 도구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회오리가 지나면서 1948년 플라스틱 공업의 발달로 얻은 비닐을 원료로 한 33과 1/3회전의 LP레코드를 탄생시켰습니다. 최초의 LP레코드는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N.미르시틴이 협연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 녹음 테이프가 개발되어 수정 녹음이 한결 쉬워졌으며, 인간의 가청(可聽)진동수(30 20,000 사이클)를 녹음·재생시키는 기계가 급속도로 개발되어 하이파이(Hi-Fi/ high fidelity)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뒤 1958년 스테레오 시스템이 개발되어 입체음향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됨으로써 레코드 음악은 획기적인 신기원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1947년부터 출현한 TV수상기가 순식간에 보급됨으로써 레코드 음악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됐습니다. TV와 VCR의 강력한 도전에 때 맞추어 1982년 레이저 광선을 이용해서 바늘없이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 장치와 반영구적인 음반인 컴팩트(Compact Disk/CD)가 개발되어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녹음된 음악을 이러한 재생장치를 통해 듣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답니다. 즉 음질이 아무리 좋아졌다 해도 레코드란 결국 생명력이 없는 통조림 음악일 뿐이며 실연(實演)음악만이 제대로 된 음악이라는 것이죠. 그런 주장이 일리는 있지만 실연음악과 재생음악이 공존할 수 밖에 없는 한계성 때문에 그둘은 서로 공존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레코드 음악...

기록상으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레코드가 소개된 것은 1887년 미국의 선교사 호레이스 앨런이 각부의 대신을 정동에 있는 자기 집으로 불러서 원통형 레코드를 들려주었을 때였습니다.

1906년에는 명창 박춘재가 기생 4명과 함께 일본의 빅터 회사에서 〈적벽가〉를 처음 취입했고 1908년 김창환이〈춘향가〉 중의 한 대목을 녹음했으며, 1913년 2월에 송만갑,박춘재, 김연옥, 조목단이 취입한 레코드가 처음으로 시중에 판매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우리나라 레코드 음악은 본격적으로 대중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는데,1926년 8월에 윤심덕이 취입한 〈사의 찬미〉가 그 기폭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바노프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의 선율에 자신이 작사한 가사를 실어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를 곁들인 음반이었던 것이었습니다. 1929년 전수린(全壽麟)이 작곡하고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노래한 〈황성옛터〉가 발매됨으로써 우리나라 유행가의 시장을 넓혔습니다.

1937년에는 서울에 있는 OK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놓기 시작했으나 서울에서 녹음만 하고 음반 제작은 일본에서 해오다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의 기쿠[菊]레코드가 폭격을 피해 공장을 한국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쟁 후 한국내 음반 제작의 모태가 된 셈이죠.

해방 후 고려, 서울, 오리엔트, 도미도, 미도파, 유니버설, 지구, 오아시스 레코드 등이 주로 유행가를 녹음했으나 1967년에 출범한 성음제작소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외국 음반회사(영국의 데카)와 계약을 맺고 라이센스 음반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성음제작소가 처음 내놓은 음반은 정경화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의 비이올린 협주곡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고 뒤따라 지구레코드에서도 라이센스 음반을 내놓았으나 성음 외에는 여전히 대중음악에만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이같이 국내에서는 예술음악,국악,대중음악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파행이 계속되었고 특히 국악 분야는 한국 브리태니커회사에서 판소리 전접과 팔도소리전집을 음반으로 내놓았을 뿐(1982) 아주 미미했습니다. 그러다가 1986년 서울음반이 출범하면서 라이센스 음반도 다양해졌고, 그 무렵 SKC에서 CD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음악 애호가들에게 음악을 고루 들려줄 수 있는 기틀이 차츰 다져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SKC 국내 연주가들의 음반을 내놓는 데 적극성을 보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1990년부터 WEA, CBS, 소니, BMG, 폴리그램 등 외국 회사가 직접 제작과 판매를 관장하기로 하자 한때 크게 진통을 겪기도 했으나 국내 레코드 회사에서도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를 벗어나 좀더 참신한 기획으로 질좋은 레코드 음악을 소비자에게 제공할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외국에서는 LP가 대부분 사라졌음에도 계속 LP레코드를 생산해온 국내 음반업계에서도 1992년부터 폴리그램에서 CD제작에 착수한 것을 계기로 LP레코드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어 지금은 CD가 레코드 산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고 이에 DVD도 계승을 틈틈이 엿보고 있습니다.

시대는 그럴지언정 LP시대가 한참을 이루고 있었던 터라 현 386세대 이전 매니아에겐 아직도 LP의 소리를 못버리고 있는 분들도 상당수입니다.
오디오에는 아예 턴테이블 이라는 것이 자취를 감추었고 따로 주문을 하여야만 구입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모든 것이 리모콘으로 작동 되는 현세대에 아스라히 작동법 마저 사라져가는 아날로그 방식을 이젠 추억으로 돌려야 할까 봅니다.

 



olddisk 2004



참고: 본문은 2004년도에 olddisk.com에 게시 되었던 글입니다.